▲ 1980년대 중·후반 삼성 라이온즈 중심 타선을 이룬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왼쪽부터) 2018년 어느 구단과 겨뤄도 밀리지 않을 타선이다. ⓒ삼성 라이온즈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 친다’ 원조 장효조, 그의 선수 시절은 어땠을까(3)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장효조는 한마디로 타격 천재였다. 아마추어 시절 장효조가 기록한 단일 대회별 4, 5할대 타율은 어찌 보면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였는지 모른다.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MBC 청룡 백인천 감독 겸 선수가 그랬듯이. 백인천은 특히 투수력이 약한 삼미 슈퍼스타즈를 상대로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프로 출범 두 번째 시즌인 1983년부터 투타 대결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투수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책으로 다양한 변화구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후반 삼성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권영호는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 구단 담당 기자에게 "이번 겨울 훈련 동안 포크볼을 익혀 실전에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투수가 자신의 구종을 밝히는 건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권영호는 이미 그 무렵 포크볼을 던지고 있었다. 새 시즌을 앞두고 더욱 가다듬어 확실한 주력 구종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의 얘기였다.

포크볼의 역사는 꽤 길다. 1970년대 일본에서 발행한 야구 서적에는 포크볼의 그립과 던지는 요령이 실려 있었다. 한국 선수들도 포크볼을 여러 경로를 거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권영호처럼 몇몇 선수가 1980년대에 포크볼을 간간이 던지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 포크볼의 위력을 실감한 건 1991년 제1회 한일슈퍼게임이었다. 구와타 마스미를 비롯한 일본 투수들은 2사 3루 같은, 상식적으로 포크볼을 던져서는 안되는 상황에서도 패스트볼을 던지듯 포크볼을 구사했다.

아무튼 장효조로서는 이 무렵 권영호가 같은 팀 소속이어서 다행이었다. 또 하나 다행은 198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이별하고 KBO 리그로 진출한 커브의 명수 김일융이 같은 팀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리그에서 강속구로 승부하던 김일융은 KBO 리그에서는 빠른 커브와 느린 커브, 각이 큰 커브와 작은 커브 등 커브가 주력 구종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피했다고 한숨 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1983년 이영구(삼미)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 타이거즈) 등과 함께 재일 동포 영입 1차 대상자로 삼미 유니폼을 입은 장명부는 히로시마 카프의 주력 투수다운 구위를 뽐내며 국내 타자들을 압도했다. 그런데 사실 장명부의 구종은 직구와 슬라이더로 단조로웠다. 그리고 일본 리그에서 뛸 때보다 스피드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로케이션이 워낙 좋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빙그레 이글스 이상군이 컨트롤의 대명사로 불렸지만 적어도 1983년 시즌의 장명부와는 견줄 수가 없었다. 주력 변화구인 슬라이더가 야구인들이 말하는 '공 반 개' 차이로 스트라이크존을 넘나들었다.

1985년 시즌 후기 리그에는 무시무시한 강속구의 선동열이 해태 마운드에 올랐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커브 못지않은 각에 어지간한 투수의 직구 스피드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 연세대와 한양대, 롯데와 포철에서 맞붙었고 국가 대표 팀에서는 한솥밥을 먹었던 '한 자[尺]' 커브의 최동원은 장효조가 프로에 입문하면서 곧바로 겨뤄야 했다.

1986년 해태가 1983년 이어 두 번째로 한국시리즈에서 오르고 난 뒤 해태 신인 투수 차동철은 이듬해 시즌에 대비해 새로운 변화구를 익히기 시작했다. 한때 'V 직구'로 불린 스플리터였다. 신인급 투수가 이 정도였으니 기존 투수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프로 첫해는 엄벙덤벙 보냈지만 첫 시즌을 마치고 적지 않은 선수들이 곧바로 유니폼을 벗는 걸 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프로 정신이 발휘되는 가운데 장효조는 데뷔 첫해 3할6푼9리(317타수 117안타)의 매우 높은 타율로 타율 1위를 차지했다. 장효조의 아마추어 마지막 시즌인 1982년 타율이 3할4푼7리(72타수 25안타)였으니 프로 투수들의 정신 자세를 '신인' 장효조의 타격 솜씨가 누른, 놀라운 결과였다.

1982년 80경기로 출범한 프로 야구는 장효조가 프로에 발을 들여놓은 1983년 경기 수를 100으로 늘렸다. 그해 장효조는 8경기에 빠졌다. 92경기 117안타(경기당 1.27개)였다. 경기당 1안타 이상은 리그를 막론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장효조는 1983년, 프로 선수 생활 동안 가장 많은 18개(1986년 타이기록 수립)의 홈런을 때렸다. 장타율이 0.618였다. 타율이 수준급인 홈런 타자 수준의 장타율이었다. 여기에 4사구를 64개나 얻어 출루율이 프로 생활 동안 가장 높은 4할6푼9리를 기록했다. 두 타석에 한 번 꼴로 출루해 22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프로 선수 생활 가운데 가장 많았다. 롯데로 이적한 1989년 시즌까지 7년 연속 4할 이상의 출루율을 마크했다.

장효조는 프로에 데뷔하던 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타격 내용을 보였다. 타격에 관한 한 장효조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즌이었다. 그런데 장효조는 신인왕이 아니었다.

장효조은 천재성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노력의 산물인 꾸준한 성적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프로 두 번째 시즌인 1984년 3할2푼4리(309타수 100안타)로 주춤했으나 1985년 이내 3할7푼3리(346타수 129안타)로 다시 타율을 끌어올리며 타율 1위가 됐다. 결과적으로 장효조가 5년 연속 타율 1위를 하는 걸 중간에서 끊은 선수는 팀 동료인 이만수였다. 이만수는 1984년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타격 3관왕에 올랐다.

장효조의 위대성은 프로 야구 출범 이전 마추어 단일 대회 최고 타율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1976년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26회 백호기쟁탈전국야구대회에는 신생 팀인 롯데 등 실업 야구 10개 팀과 11개 대학 팀이 출전해 성인 야구의 왕좌를 놓고 겨뤘다.

한양대는 준결승에서 정순명의 3안타 1실점 완투와 장효조, 김유동의 적시타에 힘입어 전년도 챔피언 육군을 3-1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양대는 결승에서 한일은행에 1-2로 졌지만 장효조는 14타수 10안타, 7할1푼4리의 전무후무한 아마추어 야구 단일 대회 최고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 1위에 올랐다. 이 기록은 '타격 천재' 장효조의 이름과 함께 영원불멸할 것이다.

참고로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아마추어 대회 최고 타율은 1993년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문희성(홍익대)이 기록한 7타수 7안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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